인문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skybluereadingbook 2024. 12. 25. 14:42
제목 : 시를 잊은 그대에게
지은이 : 정재찬
출판사 :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초판 발행일 : 2015년 6월

 

시를 읽은 때가 언제이던가?  나도 한때는 가끔 시집을 사고 몇편의 시를 외우곤 했었다.  하지만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시"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책을 다시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책은 정재찬 교수가 한양대에서 시를 강의했던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경제, 의학, 법학, 경영학, 공학 만큼이나 시, 사랑, 아름다움, 낭만이라는 것도 매우 주요한데, 그런 단어들은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경쟁사회로 내몰려서 "시"도 시 그 자체의 아름다움 보다는 입시를 위한 풀이로 배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수년전 읽어 보았던 아름다운 시의 귀절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고, 그 시들에 대한 현대적인 접목 즉 드라마, 영화, 가요와의 관계 해석 등에 의한 재해석, 그리고 시인의 삶에 촘촘히 숨겨있던 시의 탄생 이야기 도 알 수 있었다.  이책에 들어 있는 아름다운 시 귀절과 정재찬 교수의 담담한 해설을 읽어보자.

 

 

가난한 갈대의 사랑노래

 

조용하지만, 왠지 가슴속으로 팍팍 파고드는 신경림 시인의 시를 나는 좋아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고, 항상 즐거운 삶을 지향하지만, 그래도 삶이라는 것 자체는 위대하고도 어려운 것이다.  어쩌면 시인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공감하게 된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  <갈대>

시인의 
통찰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곧 인간의 유약함과 비애는 저 '바람' 과 같은 시련 때문도 아니고, '달빛' 처럼 하늘 높이 밝은 그 무엇을 지향하다가 얻게 되는 것도 아니라고.  '바람' 에 따라 흔들리는 것도, '달빛'을 좇아 흔들리는 것도 아니요, 외적인 것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내면의 슬픔으로 인해 온몸이 흔들릴 따름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17,18 페이지 중에서 인용)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

 

언젠가부터 이별이 있을 때마다 이 시를 읊게 된다.  살아온 길을 잘 마무리하고 싶지만, 우리의 끝은 혹은 이별은 항상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  복효근의 시 목련 후기에서 처럼 목련의 지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웠던 꽃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추하기 까지하다.  하지만, 나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사랑했다.  낙화에서의 꽃잎은 목련은 아닌 거 같다.  아름답게 피었다가 다시 아름답게 지는 꽃이 시 '낙화" 속의 꽃잎이다.

 

가야할 떄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떄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줒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푼 눈.

-이형기, <낙화>

봄한철, 식물이 그 자태를 있는 대로 뽐내는 격정의 나날, 꽃은 피어나고, 그리고 진다.  덧없다 하지 말라.  피었으면 지는 것이 순리다.  그 순리를 어기면 죽음뿐이다.  꽃뿐이면 꽃은 죽는다.  낙화가 없으면 녹음도 없고, 녹음이 없으면 열매도, 씨도, 그리하여 이듬해의 꽃도 없다.  꽃이 없어도 죽고, 꽃만 있어도 죽음인 것.  그러니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과 결별이 함께해야 생명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식물은 성장한다고 하고 인간은 성숙한다고 일컫는 게다.  ( 본문 62, 63 페이지 중에서 인용)


 

그대 등 뒤의 사랑

 

등뒤의 사랑, 짝사랑의 다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짝사랑이라는 낭만적인 단어가 어느덧 그 의미를 잃어가는 요즘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는 짝사랑을 천천히, 그리고 너무 힘들지 않게 하는 사람들을 위한 랩소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놀랍게도 이 아름답고 성숙한 시를 고 3의 어린나이에 썼다고 한다.

 

I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않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II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 즐거운 편지>

( 본문 109 페이지 중에서 인용)


짝사랑만이 등뒤에서 하는 사랑은 아닐 것이다.  한때는 서로 뜨겁게 사랑했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그냥 그런 사랑이 되어버린 부부들도, 사실은 등뒤에서 사랑을 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끝까지 지켜주는 등뒤의 사랑이다.  사랑은 언젠가 그치지만 그래도 그 사랑의 시간과 기다림의 시간을 추억하며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시가 없는 세상에서 정말로 시를 잊은 그대였던 나를 시의 세계로 인도 해준 시를 잊은 그대에게 는 한번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한국 근대사의 많은 주옥같은 시들을 현대의 문화와 함께 다시 만나게 된다.   2020년 리커버 버전으로 이책이 다시 출판 되었다.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해줄 시를 다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