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빛의 제국 (개정판)
지은이 : 김영하
출판사 : 복복서가
초판 발행일 : 2022년 5월
김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빛의 제국은 제목이 주는 이미지는 조금은 무거울 것 같은데, 무거운 주제를 흥미롭고 촘촘한 플롯으로 재미있게 쓴 소설이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다. 두께가 꽤 있는 편인데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여 한번에 읽어버렸다. 소설의 존재 이유, 주제도 중요하지만 재미라는 요소, 작가의 강력한 필력도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두통에는 육체의 고통과 정신적 불쾌감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었고 때문에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로서는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본문 10 페이지 중에서 인용)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제도 심각하다. 일단은 분단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는 북파공작원의 이야기이다. 간첩이나 분단 문제의 소설들은 수십년 전에 쏟아져 나왔다. 이데올로기로 나뉘어진 민족, 그리고 이데올로기 떄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어야했던 민족적 비극. 뭐 그런 것들이 예전 소설의 화두였다면, 이소설은 개인의 이야기 처럼 느껴진다. 한반도에 태어나서 분단국가에 살고, 이데올로기로 나뉘어진 집합체로서의 비극 보다는 그냥 대한민국에 불법이민을 올 수 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살아온 이야기이다.
형은 변했어. 아니, 변했을 거야. 난 형을 알아. 형은 히레사케와 초밥, 하이네켄 맥주와 샘 페킨파나 빔 벤더스 영화를 좋아하는 인간이잖아? 제 3세계 인민을 권총으로 쏴 죽이는 뫼르소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미시마 유키오의 미문에 밑줄을 긋는 사람이잖아? 일요일 오전엔 미국식 브런치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앞 바에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이고. 안그래? 돌아가기 싫어서 나한테 털어놓은 거잖아. 내가 잡아주기를 내심 바라는 거잖아. 아니야? ( 본문 316 페이지 중에서 인용 )
분단과 간첩 이야기인데, 북의 이야기는 조금 나오고, 주로 한국에서 그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남파된 이후로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다. 다행히 그는 자연스럽게 대학에 침투하여 학생운동을 하고, 같은 동지애를 가진 여학생을 만나 결혼도 하고 어느덧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 가장노릇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가 20여년간 조용히 살아오던 삶을 뒤로하고 하루 아침에 북으로의 귀환을 통보 받고서 벌어지는 단 하루사이의 이야기이다. 기나긴 그의 생활들 북에서의 20년 그리고 남한에서의 20년의 이야기는 그의 회상속에 아주 소상하게 드러난다. 그가 한국에서 맺은 관계들, 아내, 학교 후배,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들이 하루사이에 숨막히게 펼쳐지고 회상된다.
어쩌면 이것은 오류이거나 누군가의 짓궃은 장난일지도 모른다. 다른 녀석에게 가야 할 것이 누군가의 실수로 배달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나중에 보내려고 했던 건데 너무 일찍 보내졌을 수도 있지. 아니야 조금전 전화를 걸어온 자는 분명히 내이름을 말했다. ( 본문 43 페이지 중에서 인용)
이제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사뭇 궁금했지만, 사실 예상했다. 그의 선택을. 그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이주하여 새로운 세상에 심겨진 나무와 같았다. 그런데 이 나무는 뿌리를 깊숙히 내리고 어느새 새로운 땅에 동화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뿌리를 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남에 뿌리를 깊숙히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쓴 김영하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좀 어렵다. 예전에 읽었던 분단문제 소설들 처럼 무언가 확연히 드러나는 문제가 없다. 내가 느끼기에는 인생을 살아내야 했던 한 사내의 슬프지만 즐겁기도 했던 40여년의 생에 대한 짧은 시간의 회상이 아닌가 한다. 그는 자신의 삶이 흐르는데로 살아왔다. 처음에는 어떤 깊은 인식이나 의도가 있었을 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삶을 살아내는 생활인이 되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살아왔지만, 소중해진 아내와 딸도 있다. 소중하게 기억되는 그만의 취향과 시간들도 기록되었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오래된 가족관계나 부부관계는 서로의 이해관계의 소통이 단절되어가기도 하고 그 단절로 인하여 누군가는 다른 세계로의 탐험을 시작하고 그리하여 관계는 종말로 치닫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기도 한다.
잘 들어봐.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돼. 나한테도 여러 번 그런 순간들이 있었어. 그 선택들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된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그게 인간이 시간여행을 하지 못하는 이유야. 과거로 돌아가 아주 사소한 거 하나만 바꿔도 이 세상은,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내말은, 내말은 말야, 이 나쁜 자식, 내가 십오년 전에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만났더라도 진실을 알았더라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 거야. ( 본문 376, 277 페이지중 에서 인용 )
그렇게 그는 남에서 일반적인 삶을 살아내었고, 결국 그는 남에 남기로 선택한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의 소중함과 일상생활에서의 선택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한 내가 무언가를 바로 선택해야 할 때 얼마나 빨리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재미있는 소설이다.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깊은 생각도 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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