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잡문
지은이 : 안도현
출판사 : 이야기가 있는집
초판 발행일 : 2015년 9월
안도현 시인의 '잡문' 이라는 제목의 단순하고 가벼운 책은 가끔씩 내 마음이 복잡할 때 읽는 책 중 하나이다. 짧고 단순한 잡문들이 들어있다. 작가도 나름대로 그 글을 쓸 때 배경이 되는 사건과 생각들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의 일상과 나의 힘듬을 생각하고, 나의 추억을 되새긴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면서 마음의 평온을 다시 찾게 해주는 책이다.
이 글은 작가가 절필선언을 하고 3년간 트위터에 올렸던 글들 1만여개 중 244개의 글을 추려 책으로 낸 것이라고 한다. 시인이지만 시를 쓰지 않았던 기간에, 그러나 시인임을 숨길 수 없는 그의 짧은 시같은 글들을 읽다보면 시인의 손길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잔잔한 클래식과 함께 책을 읽어보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시간들이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어릴 적 외갓집 마당가에 피어 있던 달리아를 오래 들여다보던 시간이 내게는 그렇다. 그 시간들이 여름이면 내 혈관 속을 쿵쾅거리며 뛰어노는 것이다. ( 본문 11 페이지에서 인용)
삶이란 살아가고 있는 그 순간에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어떤 때는 한없이 행복했었고, 어떤 때는 하루하루 시간을 버티며 살았었다. 시간을 버티며 살아가던 때에도 나에게는 짧은 기쁨들이 있었다. 어쩌면 시인은 어릴적 달리아를 오래 들여더 보던 그 습관들 때문에 꽃을 사랑하고, 사물을 들여다 보는 습관이 생겨서, 사물을 깊이 들여다볼 줄 아는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나의 많은 시간들과 기억들도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리워하게 될 지금을 묵묵히 살아내자.
절벽이 가로막아도 절망하지 않는 강물처럼, 바위가 눌러도 아파하지 않는 모래알처럼, 장대비 몰아쳐도 젖지 않는 새소리처럼. (본문 16 페이지에서 인용)
강물이 흐르다가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된다. 강물은 절망하지 않는다. 폭포는 물의 다른 모습인데, 어떤 면에서는 흐르는 강물이나 샘물보다 한층 더 아름답다. 절망을 극복하고 내리꽂혀서 그런 걸까? 장대비가 내려도 새의 울음은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나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나의 색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면, 아니 폭포처럼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승화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강물처럼, 모래알처럼, 새들처럼 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자연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조금이라도 흉내내어 보아야 겠다.
꽃을 자주 들여다본다는 것은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짧기 때문인데 어쩌자고 나는 꽃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나. ( 본문 27 페이지에서 인용)
그렇다. 꽃을 의미있게 본다는 것, 나무를 더 자세히 보며 사랑하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어릴적에는 사는게 바빠서, 행복한 일들이 매일매일 구슬같이 굴러가서 자연을 둘러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자연을 마주하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되고 감사하게 된다.
교실에서 남자아이가 용감하게 악수를 청하기에 잡아주었더니 아이들이 줄줄이 손을 내민다. 손들은 억세지 않았고 두껍지 않았고 욕심이 없었고 헐렁했고 가벼워서 마치 허공을 한 번씩 잡는 것 같았다.
(본문 35 페이지에서 인용)
상상이 가는 장면이다. 아마도 작가가 초등학생들에게 강연을 마치고 나자 용감한 남자아이 하나가 악수를 청하고서 줄줄이 해보았을 아이들과의 악수하는 모습. 아이들의 손은 가볍고 경쾌하다. 그만큼 아이들의 마음도 가볍고 경쾌하다. 나도 어린이였던 떄가 있는데, 아빠 손 잡고서 경쾌하게 공원 나들이 가던 때가 생각난다. 어린이의 마음이 되고 싶다. 헐렁하고 가벼운 어린이의 손과 마음을 갖고 싶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학교로 가면 풀잎이 흔들리는 것도 보일거야. 구름하고 눈도 맞추게 될거야. 친구의 귀밑머리도 보일거야. 방귀도 뿡뿡 잘 나오겠지. 얼마나 좋아. ( 본문 72 페이지에서 인용)
나도 엄마가 차려준 아침밥을 먹고 학교에 가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사소하지만 행복인지 몰랐다.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학교에 가면서 많은 나무를 보고, 꽃을보고, 그렇게 친구들과 장난치면서 걷던 등교길이 생각난다. 엄마는 그 때 나를 위해 더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차려 주었는데, 그때가 좋았다. 정말 좋았다.
비가 잘 하는 일 중 하나는 처마의 말을 잘 듣는다는 것. 처마가 잘하는 일 중 하나는 비를 잘 달랠 줄 안다는것. ( 본문 75 페이지에서 인용 )
여름에 처마 밑으로 내리는 빗소리는 경쾌하다. 마치 비와 처마가 서로의 말을 들어주고 달래어 준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난 사실 처마 밑 빗소리 보다는 비오는날 자동차 천장위로 떨어지는 소리에 더 익숙하다. 비오는 날 퇴근을 하면, 지상에 주차를 하고서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여 보자. 빗소리가 경쾌하게 팅퉁탕통 울린다. 밤의 고요 속에 한참을 차안에서 빗소리를 듣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잊게 된다. 그렇게 자연의 소리는 삶에 여유와 평온을 더해 준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많이 춥니? 좋은 일이구나. 감각이 살아 있다는 뜻이야. 살아 있을 때 고마워해야 돼.
( 본문 112 페이지에서 인용)
요즘 진짜 많이 춥다. 하하하. 좋은 일이구나. 감각이 살아있구나. 그렇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하게 된다. 추운 날인데도 지하철을 타러 분주하게 혹은 느릿느릿 걸어오시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아직은 사뿐하게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 적이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나도 할머니가 되겠지. 지금 감사하자. 지금을 살자.
그날은 절대로 쉽게 오지 않는다. 그날은 깨지고 박살 나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참고 기다리면서 엉덩이가 짓물러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뒤섞이고 걸러지고 나눠지고 침전되고 정리된 이후에 온다. ( 본문 137 페이지에서 인용)
누구에게나 기다리는 그날이 있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게 만만하게 오지 않는다. 참고 기다리면서 엉덩이가 짓물러진 다음에야 온단다.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뒤섞이고 걸러지고 나눠지고 침전되고 정리된 이후에나 온단다. 기다릴수록 더디게 오는 그날. 누구에게나 기다리는 그날은 있다. 그날을 기다리면서 인내해야 한다. 하지만, 어차피 시간을 버티어야 한다면 즐겁게 시간들을 만나자. 언젠가는 오는 그날을.
저녁은 오늘 하루 열심히 땀 흘리고 일한 사람들의 밥그릇에만 담겨라.
( 본문 136 페이지에서 인용)
일하지 않은 사람 먹지도 말라는 말이 생각난다. 노동의 고귀함. 일하는 것의 가치. 그 가치가 많이 격하되는 세상이다. 어떻게 하면 불노소득들 더 많이 가질까에 골몰하고 그렇게 한자들이 승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노동은, 일은 아름답다. 일하고 돌아온 자의 밥그릇에만 담귀는 고귀한 저녁이 있다.
벚꽃이 미쳐가고 있으니 벚꽃 아래서는 한 번쯤 미쳐 봐도 좋으리.
( 본문 187 페이지에서 인용 )
벛꽃이 피고 약 3주간은 세상이 온통 벚꽃 세상이 된다. 그떄가 벚꽃 세상일까? 멀리 남쪽 진해로 벚꽃놀이를 가지 않아도 우리동네에도 벚꽃으로 미친 지역이 있다. 그떄가 되면 나는 매일 매일 벚꽃을 만나러 간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간지러운 마음이 너무 좋아서. 올해도 벚꽃이 피면 한번 쯤 미쳐봐도 좋을 것 같다.
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오늘은 연두하고 오래 눈을 맞추자. ( 본문 208 페이지에서 인용 )
나도 연두색을 좋아한다. 연두의 시절이 있다. 그런데 연두의 시절은 정말 눈깜짝할 사이이다. 연두가 너무 예뻐서 연두를 보다보면 어느새 초록이 되어 있다. 정말 짦은 연두의 계절을 올해도 꼭 즐겨야겠다. 내 인생에도 연두의 시절이 있었는데, 그 때는 내가 연두인지 몰랐다. 연두색처럼 가볍고 순수하게 살아가야겠다.
술을 마시고 나왔다. 머리에 비를 맞았다. 이유없이 좋았다.
( 본문 235페이지에서 인용)
술을 가볍게 마시고 비를 맞아 보았다. 마음이 가볍고 유쾌했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늘 가볍게 살수는 없고, 진지하게 맞서며 살아가야 하겠지만, 가끔은 인생의 무게들을 내려 놓고 하늘하늘 가볍게 술마시고 비맞으면서 살아가야겠다.
256 페이지의 짧고 가벼운 책이다. 각 페이지 마다 짧은 시인의 독백이 쓰여 있고 그 아래에는 여백이 많다. 여백에 연필로 나의 생각들을 적을 수도 있다. 마음을 추스리고 싶을 때 시집처럼 꺼내어 읽어보고 생각해보면 좋은 책이다. 나의 무겁고 버거운 근심과 생각들을 덜어내고, 가뿐한 마음으로 일상을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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